재개발·재건축단지 그들만의 공간으로 … 건축공공성 실종

2020-03-24 11:37:36 게재

재개발·재건축에 공익적 설계 없고 폐쇄·상업성만

공공건축가 선정도 불투명, 권한과 역할 확대 필요

재개발·재건축단지 등으로 매년 5000동 이상의 건축물이 들어서고 있지만 새로운 단지에 공공성이 보이지 않는다. 정부는 2007년 공공건축을 골자로 한 건축기본법을 제정해 건물이 미래유산으로 남도록 했지만, 10년이 넘은 지금 여전히 상업적 색채가 짙은 건물들만 우후죽순 난립하고 있다.

24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전국에 21만동의 공공건축물이 있다. 공공발주 건물도 있지만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대다수다. 이런 공공건축물이 매년 5000동씩 증가하고 있다.
아파트단지가 뒤쪽 산을 다 가리고 있다. 입주민들만 전경을 누릴 수 있는 이같은 설계는 건축물의 공공성과는 배치돼 보인다. 사진 이미지투데이


재개발이나 재건축은 도시 골격을 유지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에 정부는 정비사업 단지도 공공건축 범주에 포함시켰다. 이 때문에 서울시 등에서는 정비사업에 공공건축가를 투입해 기본계획과 실시설계 등에 관여하도록 해왔다.

하지만 공공건축가들이 정비사업에 투입돼 단지 전체의 공공성을 확보하기는 역부족이다.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정비사업조합이나 건설사들에 맞서 공공성을 확보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 수준이다. 재개발·재건축사업에서 공공건축가의 존재가 부정당하고 있는 셈이다.

◆재건축·재개발단지 점점 폐쇄 공간으로 = 재개발·재건축은 '내집'을 '우리집'으로 바꾸는 보완적 기능이 있다. 공동녹지를 만들어 지역 환경에 기여하고 공동체 생활을 통해 도시 기능을 떠받치는 공익적 사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건축가는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에 따라 주거환경개선사업이나 재개발·재건축사업에서 정비계획 수립의 조정과 자문을 맡는다. 재개발재건축단지에서 공공건축가가 정비계획을 자문하는 역할만 할 수밖에 없도록 제한한 규정이다. 재개발·재건축조합이 공공건축가 자문만으로 공공성을 확보했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제공한 셈이다.

정비사업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건설사들이 제안한 내용을 보면 공공성을 찾아보기 어려운데도 공공건축가들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역대 최대 정비사업으로 꼽히는 서울 용산구 한남3구역 재개발단지에 시공사들이 제안한 내용을 보면 남산과 한강은 이 단지가 차단할 것으로 보인다. 나즈막한 동네로 이어져있는 남산과 한강은 초호화 단지가 막아서고, 이는 고스란히 입주자들만의 공간으로 제공된다. 공공건축가제도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실현 불가능한 제안이다.

정부가 도입한 공공건축가제도를 정부도 기대하지 않는 눈치다. 국토부와 서울시는 지난해 한남3구역 재개발사업이 도시정비환경법을 위반했다며 시공사들을 검찰 고발하고 조합에 시공사 입찰을 다시 하도록 지도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정비사업은 공공성이 강한 사업으로 조합원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조합과 이윤을 남기려는 시공사의 계획을 꼼꼼히 살펴 도시정비법 위반 요소가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며 "현재로는 공공건축가가 그 역할을 하기 힘든 제도"라고 말했다.

서울 한강변을 중심으로 들어서고 있는 재건축아파트를 보면 공공건축가의 존재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생뚱맞은 단지도 있다. 공공건축가의 무능인지, 권한 부족인지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김예성 국회입법조사처 국토해양팀 조사관은 "공공건축의 조성계획 수립, 건축 기획, 설계 발주, 건축허가, 시공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별 공공건축가의 업무를 명시하고,업무에 따른 권한 및 책임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공공건축은 미래유산, 공익적 설계 필요 = 공공건축가제도가 건축물의 공공성 확보에 기여하려면 권한과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건축업계에서는 공공건축가 자리를 놓고 이권다툼과 계파갈등이 심각한 상태라고 진단하기도 한다.

공공건축가는 전국에서 578명이 활동하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 공공건축가 선정에 상당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임명되면 공공발주 공사의 경우 전체 공정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건축사는 "공공건축가로 선정된다고 해서 수입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어떤 때는 거의 심부름 수준의 잔일만 잔뜩하고 설계비로 1000만원만 받는 경우도 있다"며 "하지만 서울시를 대표하는 건축가로 인정받을 수 있어 건축단체간 알력이 상당히 작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건축사는 공공건축가 지정 과정이 불투명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공공건축가제도를 운영중인 지방자치단체도 17곳에 불과한 것도 문제다. 그나마 서울시는 2012년부터 공공건축가를 지정하고 운영부서로 도시공간개선단을 별도로 조직했지만, 일부 지자체는 건축업무와는 무관한 부서에서 이를 담당하는 곳도 있다.

공공건축가들의 권한이 매우 제한적인 문제가 현재로서는 최대 해결과제로 꼽힌다. 각종 심사와 자문, 설계를 수행하고 있지만 각 업무에 대한 권한과 책임이 명확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구체적인 공공건축의 규모와 운영방안에 대한 구상없이 단기간에 기획해 발주하거나 이미 실시설계까지 이루어진 상태에서 공공건축가의 자문을 받아 자문의 실효성이 없는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 공공건축가의 대우와 권한을 확대한다면 재건축재개발사업에서 공공성을 좀더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 조사결과를 보면 공공건축가로 참여한 건축가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설계비 대비 과도하게 요구되는 성과물 제출 등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서울시 공공건축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설계비 책정이 부적정하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전체의 80%를 차지했다.

국회입법조사처 김 조사관은 "국토부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민간 전문가 자문비는 해당년도 공공기관의 자문비 지급 기준을 준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지만, 자문의 경우 성과물과 연동이 어려워 자문비 지급을 못 받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며 "전문적 자문에 대한 적정 대가 산정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성배 기자 sb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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